자기연민은 트라우마를 지속시키는 내면의 악순환을 끊고,
회복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대인관계 트라우마와 수치심
대인관계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신념을 내면화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잘못된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
나는 부족하다.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문제를 일으킨다.
나는 결국 버려질 것이다.
원래 잘못은 상대, 즉 힘을 가진 어른의 폭력, 방임, 학대, 무시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아이는 그 관계를 떠날 수도, 어른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
"내가 더 착했다면,
내가 더 조용했다면,
내가 덜 힘들게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는 일종의 통제감을 주는 생존 전략이었다.
적어도 "내가 바뀌면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트라우마는 단순한 과거의 기억으로 남지 않고,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깊은 수치심으로 자리 잡는다.
이 수치심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마치 정체성의 일부처럼 몸과 마음에 새겨진다.
이러한 수치심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대인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거절에 과도하게 민감함을 보인다.
상대의 사소한 거절이나 무심한 한마디조차,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가 거부당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비판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상대의 비판이 더해질 때마다, 이미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자기비난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증폭됩니다.
상대의 눈치를 과도하게 본다. 그래서 상대가 말하기 전에 먼저 그 욕구를 알아채고 맞추어주려 애쓰며, 자신의 욕구는 뒷전으로 밀어둡니다.
경계를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약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당했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되살아나, '안 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두렵게 느껴집니다.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지만 동시에 두려움이 있다. 어디까지 마음을 열고 나누어야 안전한지 알지 못해, 관계가 깊어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끊임없이 자기비난을 한다.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릴 때, 역설적으로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위안을 얻으려 합니다.
자기연민은 수치심의 반대 방향이다.
수치심은 말한다.
"너는 잘못된 사람이다."
반면 자기연민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힘든 경험을 하고 있지만, 나는 잘못된 사람이 아니다."
이 둘은 같은 고통을 마주하는 전혀 다른 두 가지 태도이다.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공격하지만, 자기연민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며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수치심은 "왜 너는 이렇게밖에 못하니"라며 내면의 적이 되지만,
자기연민은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해"라며 내면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수치심은 자신을 고립시키지만, 자기연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고통과 자신을 연결시켜준다.
수치심 속에서는 "나만 이렇게 망가졌다"고 느끼지만,
자기연민은 "고통은 인간 경험의 일부이며, 나만 겪는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수치심은 몸과 마음에 긴장과 위축을 만들지만,
자기연민은 몸 안에서 안전감을 길러내고 세상 속에서 회복력을 키워준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의 몸은 움츠러들고 경직되지만,
자기연민을 경험할 때는 신경계가 조금씩 이완되며 안전하다는 신호를 받기 시작한다.
이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트라우마로부터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